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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들/♡자료들

역대 한국 프로야구 최고의 투수는...

by 울트라님 2005. 4. 15.

 

프로야구에는 정말 내노라 하는 수 많은 투수들이 마운드에 올랐다.

그 수 많았던 투수들 중,

과연 역대 최고의 투수라 하면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이런저런 자료들을 종합해 봤을 때...

역대 최고의 자리를 두고 경합할 만한 두 투수가 있었으니...

 

 

# 최동원과 선동렬

 


 

 

과연 두 투수중 누가 역대 최고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까?
두 투수 모두 분명한 장단점을 지니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물론 그 사실 또한 두 투수 모두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빛과 그림자
 
프로야구에서 거둔 성적만 놓고 보면 선동열이 월등히 앞선다.
85년 프로에 데뷔한 선동열은 96년 일본에 진출할 때까지
11년 동안 146승40패 132세이브의 성적을 남겼다.
특히 그가 기록한 통산 방어율 1.20은 앞으로도 깨지기 힘들 전망.

2년 앞선 83년에 프로무대를 밟은 최동원도 8년 동안
통산 103승73패 26세이브 방어율 2.46의 빼어난 성적을 남겼으나
선동렬이 걸어온 발자취와 비교하면 왠지 초라한 느낌이 든다.
또 8년이라는 짧은 경력이
그가 얼마나 빨리 시들었는지를 대변하는 듯하다.

고려대 졸업 후 바로 프로에 뛰어든 선동열과 달리
최동원은 실업팀 롯데를 거쳐 프로에 데뷔했다.
최동원의 연투 능력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독식하며
롯데를 챔피언에 올려놓은 일은 프로야구의
고전(古傳)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시 7차전 동안 5경기에 등판한 최동원은
무려 40이닝을 던졌다.
롯데 마운드를 거의 홀로 지킨 셈.

아마시절에도 최동원은 81년 실업 정상을 다투는 코리안시리즈에서
경리단을 상대로 6경기에 모두 등판할 정도로 철완을 과시했다.

그러나 최동원을 빛나게 했던 이와 같은 역투들이
결국에는 그를 빨리 시들게 하는 '독약'이 된다.
최동원은 요즈음 같으면 한창 던질 나이인 32세의 나이에 유니폼을 벗었다.
그리고 29세였던 88년 이후에는 한번도 10승 고지에 도달하지 못한다.
84, 85년 연속 20승을 넘어서고 86년에도 19승을
거두었던 그의 모습이 찰나에 사라진 듯 했다.

화려했던 순간에 비해 선수 수명이 짧았던 최동원과 달리 선동렬은
시즌별로 다소 성적의 차이를 보였지만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인
95년까지도 5승3패 33세이브로 최고투수 자리를 지켰다.
일본으로 건너가서도 데뷔 해인 96년에만 시련을 맞았을 뿐,
99년까지 통산 10승(4패) 98세이브를 챙기며 '나고야의 태양', '주니치 수호신'
등의 애칭을 남길 정도로 활약이 컸다.

 

 

병역문제에 걸려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된 점은

두 투수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선동열은 그나마 일본에서

꽃을 피웠다는 점에서 최동원의 경우는 불운하기 짝이 없었다.

최동원이 한창 뛰던 80년대 중반에는 지금처럼 FA제도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96년 선동열의 일본진출 때처럼

여론을 등에 업을 시점도 아니었다.

아마추어 시절인 81년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가계약까지 했지만

병역문제는 '넘을 수 없는 산'이었다.

더구나 LA 다저스의 박찬호처럼 유학생 신분의

편법을 이용한다는 것은 당시엔 꿈도 못 꿨었다.

 


색깔이 달랐던 두 정통파 투수

두 선수 모두 정통파 투수로 전성기 시절엔 150km 중반대의 빠른 볼을
던졌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구질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다이내믹한 투구폼을 자랑했던 최동원의 직구가 높은 지점에서
거의 대각선으로 포수 미트에 꽂혔던 것에 비해 선동열의 직구는
땅에 거의 붙어 저공 비행하는 폭격기와 같았다.
같은 구속이라도 타자 눈에 보이는 양 선수의 구질은 전혀 달랐다.

가장 큰 차이는 주로 구사했던 변화구에 있었다.
최동원은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낙차 큰 커브를 빠른 볼과 섞어가며 썼다.
최동원은 주로 두 구질에 의존했으며 가끔 우타자 몸쪽으로 솟아오르는 볼을 첨가했다.
그러나 최동원이 한창 좋을 때는 직구와 커브만으로도
타자들을 완전히 압도할 정도로 위력있는 볼을 소유했었다.

현역시절 최동원의 볼을 여러 차례 겪어봤던 김광림씨도
"아직도 최동원의 예리한 커브볼을 따라갈 만한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며
"낙차 큰 커브를 잘 던졌던 재일동포 김일융(전 삼성)도
최동원의 볼만큼은 각도가 예리하지 못했다"고 기억했다.

선동렬의 경우는 웬만한 투수의 커브 같은 각도 큰 슬라이더를 자랑했다.
단지 아쉬운 점은 최동원이 갖고 있던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변화구에 능하지 못했다는 것.
선동렬은 일본진출 뒤 종으로 떨어지는 포크볼 등의 변화구 개발에 힘썼지만 크게 재미를 보진 못했다.
그러나 슬라이더의 위력 자체가 타의 추종을 불허해
큰 어려움 없이 최고투수 자리를 지켜갈 수 있었다.

선동렬은 누구도 흉내내지 못할 유연성을 자랑했다. 활처럼 휘는 그의 투구폼은
30대 후반에 되서도 150km에 이르는 강속구를 뿌릴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선동렬은 유연한 몸 덕분에 마운드에서 최대한 타자쪽으로 왼발을 내딛어 볼을 던질 수 있었다.

선동렬의 강점 중 하나였던 유연성은 반대로
최동원에게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최동원은 시원스런 투구폼을 갖고 있었지만
다소 경직돼 보인다는 평을 적잖이 들었다.
최동원이 현역시절 몸이 비교적 늦게 풀린 것도 이런 이유 때문.
그가 너무 빨리 퇴조기에 들어간 1차 원인은 혹사에 있겠지만
이와 같은 부분도 간과할 수 없다.
 
 
[야구사 라이벌] 최동원 vs 선동렬
 
두 투수는 현역시절 세 번의 맞대결을 펼쳤다.
첫 번째 맞대결은 1986년 4월 1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있었다.
하지만 팽팽하던 균형은 의외로 쉽게 무너졌다.
최동원이 3회 해태 송일섭에게 솔로홈런을 허용한 것.
그리고 승부는 이 한 점으로 끝났다.

선동렬은 롯데 타선을 상대로 1점도 내주지 않았고
최동원 또한 더 이상의 추가실점은 용납하지 않았다.
1-0 완봉승을 거둔 선동렬열은 이 경기 후 28번의
완봉승을 추가하게 된다.
프로데뷔 첫 완봉승을 최동원을 상대로 따낸 것.
반면 최동원은 전년부터 이어오던 12연승의 기록까지
잃으며 자존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입는다.
 
이후 두 선수는 2차례 더 승부를 겨룬다.
2번째 대결은 같은 해 8월 19일 부산에서 이루어졌고
최동원은 2-0 완봉승으로 첫 대결의 패배를 멋지게 설욕한다.

그리고 '마지막 승부'가 이듬해인 87년 5월 16일에 펼쳐진다.
프로야구사의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기억되는 이 경기에서
양 선수 모두 15회 완투하며 똑같이 2실점했다.
경기결과는 연장 15회 2-2 무승부.
결국 두 선수의 상대전적은 1승1무1패로 우열을 가리지 못한다.
 
 
이렇듯 두 투수는 한국 프로야구역사에 분명한 발자취를 남겼고
그로인해 지금까지도 야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분명한 것은 두 투수중 어느 누가 더 뛰어나다라고
함부로 장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말 말 그대로 두 투수의 우열은 오직 신만이 가릴 수 있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바라는 바가 있다면 한국 프로야구사에 길이남을
두 투수의 능력을 뛰어넘는 선수들이 많이 배출되어
한국 프로야구의 중흥을 맞이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어보며
두 투수의 역대최고라는 자리에 대한 우열은 여러분께 맡기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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